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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신약

원대로 주신 분(요한복음 6:1-6:15)




원대로 주신 분

요한복음 6:1-6:15

요한복음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예수님께서 디베라에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고자 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마가복음)에 따르면,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다녀오고 이에 대한 기쁨의 보고회를 마친 후, 이들에게 휴식을 주시기 위해서 이처럼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에서 맞이한 것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바로 끈질기게 좇아오는 큰 무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10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약 5천명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 수를 셀 때에는 여자와 아이는 빠졌으므로, 아마도 총 인원 수는 만명에서 2만명 사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처럼 예수님께 나아온 까닭은 무엇일까요? 본문 2절은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이들이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와 구원의 표적을 보았고, 자신들이 가진 병과 귀신 들린 문제, 그리고 여러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이처럼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또 4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유월절 즈음이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갈 채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도 안 가고 예수님께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는 이제 성전 예배의 시대는 끝이 나고, 실질적인 참 예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시작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속사의 대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제자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요? 제자들이 이런 역사적 대변화에 놀라워하고 있었을까요? 그러기보다 아마도 잠시 쉬려고 찾아온 온 곳에서, 문둥병자를 포함한 온갖 병자들, 귀신 들린 사람들이 거의 2만명 가량 떼로 모여있으니 정말로 귀찮다 못해 짜증이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짜증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것이 우리 인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을 찾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앉으십니다. 이는 무리 모두에게 생명의 양식 되는 말씀을 잘 증거하시고 하시는 한편으로, 무리들을 귀찮게 여기는 제자들을 심정을 가진 목자요, 예수님을 돕는 동역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무리가 당신께로 나아오는 것을 보시고 이번에는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 무리들은 병들었을 뿐만 아니라, 배가 고프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빌립에게 이렇게 물어보실까요? 6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이 무리들을 어떻게 먹이실 것인가 미리 다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빌립에게 물어보시는 것은 이를 통해 빌립을 시험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선생이 제자를 시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만약 그가 이 시험에 통과하면 그 믿음을 기뻐하시고 만먁 이 시험에서 떨어지면 그를 감당하고 세우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럼 빌립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 빌립은 정말로 뛰어난 계산능력을 가진 것 같습니다. 어느 틈에 그 많은 사람들의 수를 다 세고, 또 떡 값으로 환산하기까지 하는지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는 200 데나리온, 오늘날 2000만원의 거액이 필요하다고 답을 내립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먹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여든 이들을 포기하자는 것이 빌립의 답입니다.


하지만 빌립은 머리는 좋았지만, 예수님께서 바라는 답을 내놓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라는 말 속에 예수님께서 들어가 계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먹이실 능력이 없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광야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40년간 만나로 먹이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이 분에게 결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모이신 2만명을 먹이시지 못하겠습니까.


또한 빌립에게는 목자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배가 고프면 어떻게든 먹을 것을 마련하려는 것은 부모의 마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양이 배고파 울면 목자는 어떻게든 그 양을 먹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목자의 심정이 충만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여든 무리들을 먹이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자신의 틀에 갇힌 채, 이제는 그들도 어쩔 수 없다라고 외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안드레가 불쑥 나와서 말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빌립과 다르게 안드레는 예수님과 같이 모여든 이들을 먹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들을 먹일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여든 사람들 중에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을 찾아 다니다 결국 한 아이의 도시락거리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원어성경을 보면 보리떡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 그리고 한 아이라는 단어에는 ‘작다’는 접미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만큼 아주 작고 보잘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예수님께 들고 나오자니, 많이 창피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인지 안드레도 말 끝을 흐리며 이렇게 말하나 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부끄러움, 그리고 회의와 의심이 담긴 안드레의 말에는 그래도 이들을 먹이고자 하는 진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먼저 앉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당시 누워서 식사를 하던 풍습대로 잔디 위에 비스듬히 누웠습니다. 거의 2만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누워있으니 참 장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떡을 가지고 축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드레가 들고 나온 오병이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더 가지고 오지 않았냐’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 오병이어를 주신 하나님, 그리고 이 오병이어를 들고 나아온 안드레의 진심과 그의 작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에 감사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와 떡을 떼시고, 이것들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일정량만 배급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11).” 말 그대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몇 사람만 먹었을까요? 12,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2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은 것입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이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원대로 주시고도 남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모든 것이 한정이 있습니다. 석탄도, 석유도 그러하고 심지어 물조차 그러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한계 속의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한계없고 고갈되지 않으신 무한함을 가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외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당신에게로 오는 이마다 이런 풍성함이 있을 것을 예시하십니다. 이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전주곡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따라서 우리는 이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영생의 만족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동안, 이 오병이어와 같은 사람을 받으시고 또 목자로 사용하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때때로 저를 바라보게 되면 저 스스로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자임을 보게 됩니다. 사실 목자 생활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초창기에 양이랑 주일 아침에 말씀공부하는데, 제가 3번이나 펑크를 내서 오히려 그 형제가 “내가 오히려 목자 같애”라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뒤에 듣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저에게 양한테 인정받지 못하면, 말씀이 들어가지 못한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슬픔이 밀려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을 사용하시고 어떻게든 목자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를 버리고 도망한 베드로(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이처럼 주님께서는 모든 조건과 자격에 앞서서, 당신을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그리고는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양을 먹이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런 부족한 모습이라도 안드레와 같이 들고 나오는 진심과 믿음임을 배우게 됩니다. 알만 한 사람은 제가 목자로서 많이 부족한 자임을 알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님 앞에서 죄와 허물 많은 자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모습을 들고 나오는 것이, 사람들에게 부끄러움, 그리고 비난과 핀잔거리가 될 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진심과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이런 자를 쓰셔서 양을 충만히 먹이실 것을 믿습니다.


또한, 목자로서 부끄러운 모습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하나 변화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는 인도하여 오신 광야 생활을 통해 하나 하나 불순물이 벗겨지고 그 가운데 순수한 믿음을 자리잡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에 이 예수님께서 날마다 당신을 닮아가게 하실 것을 성경에서 보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의 변화의 소망도 주님께 있습니다.


나아가 이제 또 한가지 소망을 품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오병이어가 되셔서 우리 사람의 모든 생명이 되신 예수님께서, 이런 저를 또한 오병이어로 삼아주셔서, 이 나라, 이 땅의 젊은 캠퍼스의 학생들을 말씀과 복음으로 먹이시는 목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제게 모세 형제님을 보내어 주셨고, 얼마 전에는 이전에 캠퍼스 GBS에서 말씀을 들었던, 한정우 형제님과 말씀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오병이어요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께서 이들을 또한 풍족히 먹이시고 영원토록 목마름이 없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다만 보잘 것 없이 연약한 제가 당신을 향한 믿음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