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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신약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로마서 14:1-14:12)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로마서 14:1-14:12

로마서 14장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앞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한 사도 바울은 이번에는 로마 교회의 갈등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로마 교회에는 어떤 갈등이 있었을까요?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1)”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의지가 약하거나 특별히 죄에 잘 넘어지는 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율법주의적 전통이 뿌리 깊거나 죄에 대해서 지나치게 민감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당시 로마 교회에는 율법주의적 유대교 전통에 따라 시중에 유통되는 고기에는 우상숭배 제물이 있다 하여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서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은 이래로 이 문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강한 전통에 사로잡혀 있었던 몇몇 로마 성도들은 이것이 양심에 걸려서 먹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 문제가 구원론에까지 나아가면 문제가 되겠지만, 로마 성도들 중 고기를 먹지 않는 이들은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교회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본문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 권면은 실제 로마 교회 성도들 가운데 고기 먹는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먹는 자는 “저렇게 복음의 비밀도 모르고 믿음이 약해서야 뭘 하겠어” 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은근히 자랑하고 반대편을 업신여겼습니다. 또 먹지 않는 사람들은 “저것들은 전통도 근본도 없이 음식을 먹는 야만인들이다”라고 반대편을 판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갈등이 커지며 갈수록 성도들은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20절에서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 문제는 이들이 결코 이런 식으로 다툴 일이 아니었습니다. 먹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대치하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이 문제로 싸우겠습니까. 특히 성도들이 서로를 정죄하고 판단해서는 안 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4).”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사 다만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가 남의 구원에 대해 어떻게 불평할 수 있습니까. 구원의 권한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노예의 생사여탈권은 주인에게 있는 것 같이, 그리스도의 귀한 피 값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형제들의 재판관이 되어, 유죄냐 무죄냐 따지는 판단과 정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판단의 권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둘째, 그 동기가 “주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로마 성도들 사이에는 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절기를 지키는 것도 문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과 은혜 안에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문제로 논쟁치 말고 각자가 마음으로 확정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 앞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 확정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 6-8절에는 “주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5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 동기와 목적이 ‘주를 위하여’ 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아닌가입니다. 그럼 왜 우리의 삶이 이래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공로로 구원과 부활을 은혜로 받게 되었으니 우리가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를 위하여 한 일에 대해서, 그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른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결국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오늘 요절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10절). 우리는 각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거나 업신여길 자격이 없습니다. 그 날이 되면 “주께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는 말씀이 응하게 될 것입니다. 각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기에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할 여유도 없고 또 간섭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삶이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 삶인가 돌이켜봐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가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실제 삶 속에서 다른 형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요 근래 장막 형제들과 의견 충돌이 잦았습니다. 그 중 어떤 형제는 저하고 생활 방식이 너무나도 다르고, 또 장막 공동체에서 너무나 이기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 같아 제 마음이 이 형제를 받아들이기가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 형제를 정죄하고 판단하였고 이런 사람과는 멀리 좀 떨어져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제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권한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제게는 그럴 자격도 권한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은혜로 구원 받은 자요, 또 저 역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자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악한 세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비평도 해야 할 필요도 있고 때로는 목자로서 양들에 대해 책망과 권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을 돌아봄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동시에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받으신 자라면 누구든지 환영할 수 있는 내면성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