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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신약

세상의 빛 예수님(요한복음 9:1-9:12)

세상의 빛 예수님

 

요한복음 9:1-9:12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세상의 불행, 그러나 그 가운데 선하신 하나님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행이 길을 가는 도중에, 맹인인 사람을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으로 유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이 맹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또 이 맹인을 볼 때마다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맹인을 보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 죄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성경적으로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3, 4대에 걸쳐서 보응하실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린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죄를 범할 경우 질병으로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성경에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장애나, 병과 같은 불행에 대해서 인과응보적인 관점에서 종종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나 팔자 같은 것, 그리고 서양에서의 fate라는 생각 역시 이런 인과응보적인 관점의 대표적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이 실질적으로 좋은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해석이 된다는 것과 또 현실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 내적인 갈등을 해결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불행의 원인이 ‘죄’일까요? 사실 어떤 불행의 원인은 죄가 맞습니다. 그러나 모든 불행의 원인을 죄 탓을 돌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바로 현실에는 인과응보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우리는 악인이 오래 살고 부귀를 누리는 모습을 때때로 보기도 합니다. 반면에, 선인이 일찍 죽고 고생을 더 많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과보응적 세계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날 때부터 맹인’인 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이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그가 맹인이 되었다면, 엄마 뱃속에 있는 동안에 그가 무슨 죄를 지었냐는 반박이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그의 부모의 죄로 말미암아, 이런 불행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면, 반대로 왜 부모는 멀쩡한가에 대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부모의 죄 탓이라고 할 때, 자식인 맹인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장애가 주어지는 것은 지나친 징벌이다 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모든 불행의 근원이 죄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욥기, 하박국서, 그리고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말씀의 주인공들이 겪는 불행은 그들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의인이 끔찍한 고통을 겪는 역설적인 상황이 주어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오늘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 맹인의 불행이 그나 혹은 그 부모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온전히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때때로 불행과 고통도 사용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유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비록 고통과 고난, 불행이 보기에는 정말 괴로운 것이나, 동시에 이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영광 받으시고, 또 이를 통해 우리에게 참된 유익을 주시고자 하시는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고난에 대해 “하나님의 엄격한 자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고난과 불행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불행 앞에서도,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발견하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빛 예수님,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예수님께서 이어 말씀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 예수님께서는 지금이 낮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때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럼 낮과 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5절은 이에 대한 중요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낮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순간이고, 반대로 밤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지금은 낮인 것이고, 낮에 사람들이 일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 밤이 이를 때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3일간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현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마음에서 예수님을 빼앗긴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이르면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빛 예수님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순간이 고난과 불행으로 말미암아 좌절과 절망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과 불행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감행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빼앗기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은 모든 선한 행위에서 드러나는 일입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래 이 땅에는 여러 크고 작은 혁명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혁명들이 하나님의 일과 그 열매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오늘날 더욱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큰 환멸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좌절과 절망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이 예수님의 소식이 필요합니다. 슬픔과 운명 속에 갇힌 이에게 이 예수님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좌절과 절망 가운데서도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일어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 오늘 실로암 못에서 맹인이 두 눈을 뜨는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게는 마음이 가는 한 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분의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목자로서 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복음을 드러내어 증거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목자님들은 여름수양회에도 초청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시는데, 선뜻 예수님을 증거할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큰 절망을 안고 있는 이에게 어떻게 복음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만이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신다는 것을 깊이 믿고 고백하게 됩니다. 정말로 이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으시면 칠흑 같은 어둠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영원토록 함께 살아 계십니다. 이처럼 태양보다 더 밝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데, 저는 아직 밤이라고 말하며 어둠과 운명주의 속에서 팔짱만 끼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두운 마음에 빠져, 맹인을 보고 패배감과 좌절 속에 있던 제자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음을 깊이 회개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어두운 슬픔과 운명 속에 있을 양을, 이제는 적극적으로 찾아서 세상의 빛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증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두운 좌절 속에 있던 저를 찾으신, 이 예수님께서 이 분의 빛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