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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먹기/구약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창세기 32:1-32:32)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창세기 32:1-32:32
창세기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라.”

라반과의 일이 마무리되고 야곱은 그곳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에서와의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자신이 속임수로 장자권을 가로챘던 결과, 형이 여전히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죄는 관계성을 파괴하고 두려움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 앞에 사람은 늘 불안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1, 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습니다. 그 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야곱은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며 감동하였습니다. 그래서 에서와의 화해를 기원하며 그곳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에서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제 가나안 땅에 돌아왔으니 선물을 드리고 또 은혜 받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들고 온 소식은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뉴스였습니다. 이 때 야곱은 어떠했습니까. 7절을 전반부를 보십시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해 했습니다. 이는 그가 에서를 두려워 했지만, 보다 깊이는 그가 그 형제에게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에서가 400명과 함께 그를 죽이려 오는 게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야곱이 두려워 함은 그가 하나님과 형제 앞에서 죄를 범하였고, 그 죄의 대가로 양심이 그를 심히 옥죄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심히 두렵고 답답해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야곱은 처음에 어떻게 합니까? 7,8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자신의 일행과 양, 소 등을 모두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이는 에서가 공격할 때, 한 떼라도 건지기 위한 야곱의 얄팍한 포트폴리오 투자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결국 야곱은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야곱은 이제야, 벧엘에서의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한 후, 애걸복걸하며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11).” 천하의 야곱도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어두운 밤을 보낸 후, 야곱은 자신의 소유 중에서 에서에게 줄 예물들을 택하여, 세 떼로 나누고는 차례차례 가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이를 보고, 에서의 마음이 누그러지기를 바라는 야곱의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 예물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조차 한계가 있었습니다. 야곱은 걱정과 불안, 두려움 속에 밤을 설치다, 결국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넌 후, 자신만 돌아와 건너편에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외롭고 홀로 된 시간, 이는 야곱이 안간힘을 쓰며 모아 온 재물, 가족, 사랑하는 아내 등등 자신이 추구해 온 모든 축복들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순간인 동시에, 이것이 나에게는 실제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야곱이 홀로 남은 그곳에 어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져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는 날이 밝도록, 안간힘을 쓰며 서로 씨름을 하였습니다. 끝까지 승부가 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고 관절이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끝까지 그 사람을 놓지 않았습니다. 참 야곱답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물어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에 답합니다. “야곱이니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자아를 가진 우리와도 씨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깨어지는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우리 혼자 당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우리와 함께 씨름하시며 이를 감당케 하십니다. 로마서 8:26절은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고난 가운데 탄식하며 연약하여 기도할 바도 알지 못해 주저앉을 때, 그때조차 우리는 홀로 있지 아니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와 더불어 우리 안에서 탄식의 씨름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씨름함으로서, 우리가 실제 누구인지를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저마다 나름대로 “야곱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씨름의 결과 야곱은 새 이름,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하나님과 및 사람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씨름하던 그 브니엘 땅에 해가 돋았습니다. 이제 야곱의 삶에 새 날이 밝은 것입니다. 이 후 야곱의 인생은 이스라엘, 즉 180도 다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과 싸우지 않고 하나님과 기도의 씨름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축복을 쟁취하려는 삶에서, 도리어 축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의지와 성실로 사람들과 부딪히던 온전한 몸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야곱과 같이, 자기만의 축복을 위해 투쟁하고 죄만 쌓아가던 인생들을 부르사, 아낌없이 구원을 베푸시고 오히려 복 주는 목자의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 드립니다. 저는 마치 얍복 강가에서 씨름을 하고 있는 야곱의 이 모습이 마치 저의 모습 같이 여겨집니다.

지난 3년 반의 시간 동안, 제 삶은 깊은 터널과도 같았습니다. 학부 시절, 저는 자기 성실과 열정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학점도 받았고, 센터에서도 말씀에 열심도 있었거니와 비전웍스를 비롯하여 여러 역사들을 섬기며, 많은 목자님들로부터 인정도 받고 있었습니다. 허나 실제적으로는 저는 지나치게 자기 성실과 열정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그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대학원 생활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 저는, 갈수록 늘어나는 과제와 요구들에 대해 점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밤을 새어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영적으로도 그 한계가 다가왔습니다. 대학원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술을 마시는 등, 세상의 방식과 타협하기 시작했고, 또 어머니께서 서울로 올라오시자,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장막을 나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타협하다가, 급기야, 큰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불상 앞에 절하는 우상숭배의 행위까지 저지르니 넉다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의지하던 모든 것, 특별히 나 자신은 이처럼 아무 것도 아니요 다만 죄인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인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씨름하여 주셨습니다. 너무나 지치고 외로움과 정죄의식에 시달릴 때, 주님께서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여러 신앙 선배들의 책들 가운데서 저와 씨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자격과 조건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믿음으로 일하게 하셨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고린도전서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정말 주님께서는 행위 그 자체를 원하시기 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신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주께서 아신다는 것을 알고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우상숭배 사건 이래의 온갖 정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지금까지 자신을 의지하던 자를 깨뜨리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물론 육적으로는 예전만 못해진 것도 있습니다. 이제 과거처럼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또 이전에 다른 사람과의 논쟁에 능한 자였지만, 이제는 말하는 게 때때로 어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전보다 더욱 깊이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제 삶을 사용하여 주셔서, 이제는 축복하는 사람으로, 또 기도의 싸움을 싸우는 기도의 사람으로 빚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가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