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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구약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시편 42편)

시편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오늘 이 시 첫머리부터 시인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우리는 사슴이 물을 마시는 풍경이라 하면 깊은 산속 옹달샘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동의 뜨거운 태양과 건조한 초원을 가로지르며, 사슴이 간절하게 물을 찾아 헤매이는 모습을 떠올려야 합니다. 즉, 마치 사슴이 중동의 뜨겁고 더운 날 숨을 헐떡이며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지금 이 시인 역시 하나님을 마음에서부터 간절히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하나님을 목마른 사슴 같이 애타게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여기서 우리는 시인에게 원수의 압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슬픔으로 말미암아 고개를 푹 숙이고는 늘 어두운 얼굴로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본문 7절에서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쓰는 것 같다”고 고백할 정도였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마음속으로 속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그토록 하나님을 갈망하는 데, 원수의 압제라든지, 너무나 상하고 지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지 못함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더욱 속상하게도 사람들과 대적들이 종일토록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또 이 상황은 시인의 과거의 삶과는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성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마치 꿈만 같던 그 시간, 하나님을 크게 기뻐하고, 은혜에 저절로 찬양하며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나아가 전도하고 성전으로 인도하던 찬란했던 과거는, 지금은 시인에게 말 그대로 꿈만 같아 보입니다. 이럴 땐 정말 마음이 상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 칠흑같이 어두운 이 시간에 시인은 노래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그는 실로 깊고도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원수가 득세하는 세상, 하나님께서 조롱받는 이 세상에서 희망을 두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실제로 시인은 깊은 낙심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떠는 자신의 영혼에게 시인은 스스로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내 영혼아 ...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는 낙심하였지만 주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고난조차 하나님께서 주신 파도요 물결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비록 이 고난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 은혜와 인자를 보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8).”

하나님을 찾는 그의 기도가 어떠합니까?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시인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상황을 토로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견고한 반석이시기에,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의 상황을 역전시키시고 구원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제 다시 다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셨습니까? 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공교롭게도 이 시인의 기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부르짖음과 비슷합니다.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심으로 역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영원 전부터 함께 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버림받았고,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또 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와 임마누엘 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견고한 반석이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고아와 같이 방황하지 않으며, 다만 이 하나님을 목마른 사슴 같이 갈망하며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주 하나님만이 우리의 반석이시오, 영원토록 우리와 임마누엘 하시고 우리를 기억하사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인과 같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시기에,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난이 찾아와 어떤 소망조차 끊어질 때,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실까 의심이 들 때에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엔 이 시인과 같이 나를 대신하여 버림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 복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이 복음과 함께 우리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하나님께 갈급함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또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모든 파도와 물결에서도 우리를 능히 구원하시고 이를 통해 찬송과 영광 받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 날마다 이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기도가 충만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암담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