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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구약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1-12:9)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1-12:9

창세기 12장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담의 범죄 이래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갈수록 악해졌고, 하나님께 대하여 더욱 더 반역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사 인류와 세상을 대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죄악은 그대로였습니다. 특히 대홍수 심판 이후 니므롯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께 반역하고자 하는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참으로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타락하여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인간의 죄악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절망치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전과는 다른 특별한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이는 아브람이란 한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새로운 민족을 이루고, 그 민족을 통해 마침내 구세주를 보내사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함으로서 아브람에서부터 예수님의 족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아브람은 우리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요(롬 4:16), 믿음의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롬 4:12). 따라서 아브람을 공부하는 것은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현 시대는 아브람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업신여기는 풍조들과 죄악들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또 찾으십니다. 지금 이 제자 수양회 가운데에서도 찾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김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로서의 부르심에 믿음의 결단을 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 1장 너는 너의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아브람의 가정에 대해서는 창세기 11:27-11:32 말씀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는 데라로 그는 셈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데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아브람, 나홀, 하란으로서 이 중 하란은 롯을 낳고는 일찍 죽었습니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했는데, 나이가 들어도 사래가 임신치 못하여 자식 문제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한편 데라는 가족들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7:3절에서 보이듯이,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데라는 아브람을 비롯한 그의 가족 모두와 함께 그만 하란에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데라’라는 이름은 머뭇거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하란’이란 도시의 이름은 ‘열매가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머뭇거린 데라는 열매 없이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아브람도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인생의 열매도, 자식도 없이 쓸쓸히 한 줌의 흙으로 허무하게 멸망할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머뭇거리는 인생에는 이처럼 열매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다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하였습니다. 본문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본문 2,3절의 약속의 말씀을 주시기에 앞서서 먼저 명령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아브람의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아브람이 떠나야할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은 어떤 곳일까요?

 

아브람의 고향은 앞서 말할 것처럼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오늘날로 따지면 미국의 뉴욕과 같은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도시 곁에는 거대한 유브라데스 강이 흘렀고 수많은 운하가 있어 토지가 매우 비옥했습니다. 도시 가운데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급의 웅장한 신전인 지구라트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 도시는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하여 인도와 교역할 정도로 융성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매우 높고 지식수준도 또한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찬란한 문화의 발달과 함께 갈대아 우르는 니므롯의 후손이 다스리는 우상숭배의 도시로 3000개 이상의 우상이 넘쳐나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달의 신이 이 우르의 주신이었지만 평민들이 모시는 신전도 여러개 존재하였고, 또 가정마다 가족신이 있어 이를 숭배하였다고 합니다. 우상숭배가 거의 생활화 된 곳이었던 것입니다. 또 이와 같은 우상문화는 쾌락주의를 낳게 됩니다. 우상숭배 뒤에는 꼭 음란한 행위가 뒤따랐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살던 아버지 데라의 집은 또 어떠했습니까? 여호수아서 24장 2절을 보면 데라가 우상을 숭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우상 판매업자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브람이 이 집에 머물러 있으면 그 시대의 악한 영향력 속에서 조상의 망령된 행실대로 헛된 우상을 섬기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는 아브람을 쓰실 수 없으셨습니다. 이처럼 우상숭배로 가득하여 죄의 영향력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 아브람은 벗어나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 역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이것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되는 환경과 습관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2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말씀처럼 우리는 옛 습관과 환경을 따르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새 사람이 되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은 성장의 기쁨이 있고 좋은 열매가 있게 됩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예전 습관과 환경은 무엇일까요? 일례로 예전부터 저는 일본 음악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실제로 사 모은 CD도 제법 됩니다. (참고로 노래는 잘 못 부릅니다.) 그런데 한번은 어떤 목자님으로부터 일본음악 대신에 한번 CCM을 가까이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 권면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치기어린 마음에 그 말을 흘려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찬송가를 가까이 하게 되었고, 이제는 하루에 찬송가를 부르지 않으면 허전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일본음악 등을 듣고 부르면 마음이 쓸쓸해지고 공허해졌는데, 찬송가를 부를 때에는 반대로 마음이 따뜻하게 채워지고 기쁨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특별히 기도하기 전에 기도할 마음이 나지 않을 때, 찬송가를 부르면 어느 덧 마음이 열려서 더욱 더 깊이 있게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욱 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전의 작은 습관 하나에서 벗어날 때,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의 충만한 기쁨을 주십니다.

 

둘째로 이것은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대아 우르와 데라의 집은 우상숭배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상숭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아브람이나 우리에게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있다면, 그것에서 떠나기를 원하십니다. 성공과 명예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여기서 떠나야 합니다. 남자 친구, 여자 친구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여기서 떠나야 합니다. 돈과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여기서도 떠나야 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이것도 부인하고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1:37-39)” 이처럼 다른 것을 우상으로 삼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도저히 쓰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우리 역시 우리가 목숨과 같이 사랑하는 것들, 특별히 자기 의와 자기 사랑까지도 내던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사랑하는 고향 땅,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고향은 익숙하고 정겨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산 토박이입니다. 그래서 1년에 한번 부산에 내려가면 그곳의 갯바람 내에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또한 이번에 신종플루에 걸려 근 1주 간을 열로 끙끙대며 고생하면서 정말 부모집을 떠난 서러움이 밀려오곤 하였습니다. 하물며 고대 시대를 살아가던 아브람에게는 이 일이 얼마나 더 힘들었겠습니까? 그의 나이는 자그마치 75세,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는 너무나 힘들어 보이는 나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75세의 노인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찮은 이름 없는 노인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브람에게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또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 역시 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명하시는 대로 내가 목숨같이 사랑하던 것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곳이면 어디라도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제 2장. 너는 복이 될지라

 

이처럼 명령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엄청난 약속과 소망의 말씀을 아브람에게 주십니다. 본문 2,3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2,3)” Living Bible을 살펴보면 2절 말씀 앞에 ‘네가 그렇게하면’(If you do)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약속과 소망은 아브람이 순종할 때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브람이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지금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것도 75세의 나이 많은 노인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제 황무지와도 같고 고목나무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현실적으로 이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늙고 자식도 없는 아브람에게서 어떻게 큰 민족이 나올 수 있을까요? 다른 누군가가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헛소리 말라고 화를 내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 실제로 이 말씀을 믿은 아브람에게 이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눙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특별히 큰 민족은 영어로 보면 Great Nation, 즉 위대한 나라, 위대한 민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18:18,19절은 이 민족이 구체적으로 어떤 민족인지를 말해줍니다. 바로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의와 공도를 행하는 민족”이 Great Nation인 것입니다.

 

아브람의 때에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를 세우심으로, 그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위대한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십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으셨다면, 아브람처럼 인생에서 아무런 열매도 의미도 없이 그럭저럭 살다가 그저 사그라질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라 비틀어진 고목나무와 같던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이 위대한 소망은 이 자리에 모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반드시 당신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위대한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십니다. 이는 영어 성경으로 보면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위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을 흠모합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의 이름과 명예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세상 명예는 풀의 꽃과 같아서 허무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BC 2000년 전, 아브람의 시대에 살던 사람 중에서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이름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이름도 없이 사라질 할아버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유명케 하셨을 때 그는 이름도 없이 사라질 무명의 할아버지에서 역사상 모든 믿는 자들이 흠모하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그의 이름은 ‘열국의 아비’, ‘선지자’,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하나님의 벗’, ‘여호와의 종’, ‘이스라엘의 조상’, '믿는 자의 조상(롬 4:16)‘ 등으로 남아 실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름을 흠모하여 어떤 부모들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자식에게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링컨의 이름 역시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이처럼 위대하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명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위인이 되기 위해 그 이름을 사모하며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진정 유명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설령 세상의 명예와 유명을 얻지 못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께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 끝 날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여” 주님의 칭찬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지속될 우리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복이 되게 하십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이 말씀은 아브람을 복덩이로, 다시 말해 축복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아브람의 모습을 보면 이 사람이 과연 복덩이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에게 내가 가진 복을 좀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75세가 되어서도 그토록 소원하던 자식도 없는 아브람이 불행하면 불행했지 어떻게 복덩이입니까? 하지만 이 말씀에는 반드시 아브람을 복덩이가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복이란 돈과 명예, 행복, 건강, 성공과 같은 세상의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복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영적인 축복입니다(엡 1:3). 이는 우리 죄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으로 파멸할 운명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축복을 말합니다. 따라서 복덩이가 된다는 것은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75세가 되도록 자식도 없이 외롭게 사라질 불행한 존재였던 아브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복덩이가 되어 도리어 축복하는 사람이 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본문 3절에서 아브람을 복으로 삼겠다는 말씀의 뜻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계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말씀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이는 아브람을 축복의 기준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아브람을 저주한다면 그는 아브람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 특별히 아브라함의 계보에서 나실 메시아를 저주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이에게 당연히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을 축복하는 이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축복하는 것이 됩니다.

 

둘째, 이는 아브람을 축복의 모델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9절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같이 복을 받으리라”는 이 말씀처럼 아브람의 믿음은 그의 뒤를 따르는 믿음의 후예들에게 좋은 모델이자 본보기가 됩니다. 따라서 아브람처럼 믿음으로 살 때 아브람에게 임한 동일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이 아브람의 인생을 잘 배워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인생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이는 아브람 때문에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저주를 받은 것처럼, 아브람 한 사람과 그의 믿음으로 인해 모든 인생을 축복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대로 아브람의 자손 중에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해방할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셨습니다(갈 3:16).

 

이상에서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한 사람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통해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우상 숭배의 죄로 물들어 소망이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절망치 않으시고 보잘 것 없이 나이 많고 자식 없던 아브람 한 사람을 부르심으로 소망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람의 가능성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 한 사람을 통해 만민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셨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한 알의 씨앗이 많은 알곡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아브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이 땅의 썩는 밀알로, 캠퍼스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신 여러분과 저 역시 결코 미미한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민족, 위대한 사람, 복덩이의 소망 가운데 부르셨기때문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우리 인생이 아브람과 같이 열매 없는 인생에,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할 지라도,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갈라디아 3장 29절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따라서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에서와 같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크고 위대한 민족을 이루실 것이며, 우리의 이름을 위대케 하실 것이며, 우리를 온 열방의 복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소망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2).” 우리가 이 하나님의 소망을 깊이 영접하고, 온 세상의 복이 되는 삶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3일 연속 새벽 메시지로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너는 복이 될지라”는 이 약속과 소망의 말씀을 전하는 이 일이 제게는 더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현실적 상황이 너무나 이 약속의 말씀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학원 생활을 시작한 이래 지난 3년 동안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열매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역사학자의 꿈을 이루고자 의욕 넘치게 시작한 대학원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학원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외국어 문제였습니다. 독일사 논문을 쓰려고 하는데, 독일어는 커녕 영어 실력도 떨어져서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점점 대학원 수업은 제게 갈수록 버거운 것이 되었고, 급기야는 밤이 새도록 공부하여도 제 힘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중간에 수업조차 포기해버렸고, 결국 대학원 교수님들과 학우들에게 완전히 찍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내가 왜 대학원에 들어왔을까 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꼬일대로 꼬인 지금까지 빌린 학자금 문제, 논문 문제, 장래 문제가 심히 두려웠습니다.

 

또한 영적으로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특히 지난해 여름에는 집안 어른들의 눈치를 보다가 큰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불상에 결국 절을 하는 우상숭배의 죄까지 범하였습니다. 그 후 근 반년 간, 영적으로는 저는 죽은 자나 다름없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런 가운데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저를 붙들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지금쯤 낙향해서 아버지가 꾸려가시는 식당 서빙일이나 돕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실패만 거듭한 저로써는 이 어마어마한 약속의 말씀을 전하기가 매우 부담스러웠습니다. 도저히 뭐라고 말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신종플루에 걸려 1주일간 꼼짝않고 누워있었는데, 말씀을 봐도 한숨만 나올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괴롭고 아픈 가운데서도 이 소망의 말씀 앞에 나아오면 나아올수록 제 심령에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비록 지난 3년간 아무런 결실이 없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나아진 것은 없어보이더라도,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나를 통해 두고 계신 소망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는 이 말씀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계속해서 말씀을 들었을 때, 지금까지 제가 결실이 없었던 목자일지라도, 정말 세상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인 미미한 사람일지라도, 그리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에는 오히려 턱 없이 불쌍해 보이던 나도 하나님께서는 쓰셔서 위대하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이 약속의 말씀이 저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어진 약속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나아가 이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이끄심을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이신 저와 여러분 중에 75세를 넘은 이가 있습니까? 그런데 75세 아브람에게 임한 이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젊은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제자의 삶,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라도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의 말씀이 이 땅과 우리들에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럼 요절 말씀을 다같이 읽고 제가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